남들에 대한 시선과 남들이 바라보는 나의 기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포기하고 내려 놓겠다고 그렇게 다짐하고 다른 이들과 이야기 할 시간이 있을때마다
그것이 나의 다짐이고 미래인듯이 이야기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런 사람입니다.

여전히 나는 내가 없습니다.
참 답답합니다.
잘 나가는 소위 잘가는 목사님들을 부러워합니다. 때로는 시기 할때도 있습니다.
성경을 잘 아는 목사가 되려고합니다.
신학을 잘 아는 목사가 되려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성경을 살려고 눈물나게 애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신학을 삶으로 드러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실 드러낼 신학도 없습니다.

어느날 이런 나를 포기하고 싶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핑계 거리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쪽이든 이름이 남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마음이 불편합니다.
성공하든(?) 아니든.. 이름이 남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마음을 보니..
아직도 여전합니다.

그냥 살아가는 사람,
그냥 살아가는 목사가 되고 싶은데..
그게 잘 안됩니다.

오늘도 실패하고 가슴 아파하고
오늘도 화 내고 가슴 아파합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 이 어둠과 슬픔과 답답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목사로 저를 사용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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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금도 여전히 창조과학이라 불리는 일련의 활동이 활발하다.
많은 교회들이 창조과학회를 초청하여 강연을 듣고 하나님의 존재와 창조의 이야기를 확증하려고 한다.
진화론에 대한 반응으로 진화론을 부정하기 위해서 창조론을 이야기한다.
과학교과서에는 창조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는다.
진화에 대한 언급만 있다. 오래전 미국의 한 주에서 창조론도 과학 교과서에 실어야 한다고
소송을 한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패소하였다. 진화론만 교과에서 실어야 한다고...
기독교 국가라 불리는 미국에서 일어난 일이다.
대통령이 선서할때 성경에 손을 얹고 선서하는 나라..미국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특히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진지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창조론이든 진화론이든..그것을 왜 증명해야 하는가?
창조론의 이야기로 하나님을 증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진화론을 이야기하니 창조론을 이야기하고..그것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과학의 허구를 지적하려 한다.

난 이부분에 대해서 반대한다.
난 진화론을 인정한다.
물론 창조론도 인정한다.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창조진화론도 아니다.
과학도 종교도 여전히 불안전한 상태라고 나는 여긴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활화산 같은 ....
과학은 끊임없는 가설의 등장과 반복적 실험으로 얻은 결과를 통해 인정하는 정설..
그리고 또 다시 깨어지는 정설은 새로운 가설을 만난다.
토머스 쿤은 이런 과정을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이야기했다.
이전 가설은 새로운 가설과 함께 존재할 수 없다. 패러다임은 변화한다.

부족한 인간의 힘으로 판명하는 내용을 가지고 하나님을 정의하려고 하는 일은 무모한 일이다.
하나님께서 첫찌날은 무엇을 창조하시고 둘째날은 무엇을 창조하셨는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그 내용으로도 모순되어 있는 부분이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창조를 부정하는데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가 무엇이 중요하다 말인가? 이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
신앙의 고백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것, 그것이 문제인것이다.
이것이 과거 기독교가 세상에 폭력적으로 행한 많은 일들을 촉발시킨 것이다.
그리고 과학을 종교으 영역에서 밀어내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과학을 옹호하면 무신론자가 되는 것으로 잘못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과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인간의 폭력적 자연 지배를 정당화 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닮은 최고의 창조물이라는 이유로..
그러나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면서 보시기에 좋았던 이들은 모두이다.

종교와 과학 만날 수 없는 원수인가?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한국 기독 사회는 지나친 이분법에 빠져있다. 그것이 종교를 유지하는 힘인냥 잘 못생각한다
오히려 그것이 종교의 미래를 불안하게 하는 일인 것은 모르고..
하나님을 어느 한계점 안으로 몰아넣으려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이것은 정리되지 않은 나의 생각이다. 더 정리해야 겠지
그러나 창조과학을 이야기하는 많은 이들에게
권하고 싶다. 양쪽의 책을 2권씩만 읽으라..그러면 좀더 생각할 여지를 갖게 될 것이다.
권하기는 도킨스의 책은 읽지 말기...그이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억지를 부리고 있다.
사실 그 모습에서 종교의 모습, 기독교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하나님을 가두지 말았으면 좋겠다.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이론으로 신학으로 과학으로 하나님을 가두려 한다.
열려계신 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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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두 아이...
지금 내 곁에 가장 가까이 살고 있는 가족입니다.
유라와 유빈..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에게 주신 귀한 선물...그리고 숙제.. ^^

아내와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늘 감사한 마음입니다.
건강하게 지내는 것이 무엇보다 큰 감사입니다.
프랑스에서 병원가는 일이 쉽지 않은데..
큰 병 없이 잔병도 별로 없이 아주 잘 자라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 감사합니다 더욱 감사합니다.
요즘은 유라의 말 느는 것 보는 일..
유빈이의 재롱 잔치...
이 보다 더 큰 즐거움이 없습니다.

삶의 기쁨입니다.
삶의 큰 힘이고
삶의 버팀목입니다.

이들과 더 큰 감사와 기쁨을 나누며 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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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일이 그렇게 바쁜것도 아닌데 여러가지가 버겁다..
블로그에 글을 남기는 것도 참 오래간 만이다.
난 항상 용두사미가 문제다.
시작할때는 뭔가 그럴듯하게 할 것 처럼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시들해 진다.
벌써 이곳도 그런 마음이 들기도 하고..
내 역사를 남긴다는 의미에서 시작한 일이지만
역사와 생각을 남긴다는게 여간 부담스런 일이 아니다.

요즘 트위터를 친구와 시작했다. 그런데 별반 재미없다.
블로그를..몇개 한다.
이곳, 아들과 딸을 위한 각각의 블로그 두개
친구들과 하는 팀 블로그..
네이버에 개인 블로그...이건 거의 죽은 블로그...프랑스 여행 정보를 올리기 위해서 살려 놓은 ..
페이스 북..이것도 시작해 봤다.
아내는 뭐 이런걸 이렇게 많이 하냐고 하나만 하라고 하는데..
연결되는 사람들이 다르고 만나는 장소가 다르다 보니..라고 변명하지만..
그냥 해 보고 싶은 것인지도...잘 생각하고 정리해야 겠다..
시간이 부족하다...
그러다 보니 이곳도 내가 숨을 주지 않으면 숨쉴 수 없는 공간인데 숨을 주지 못하고 있다.
슬슬 시동을 걸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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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 E-book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한국 출판 현황에서 E-book은 많은 비중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시장성이 없는 듯하다. 교보문고와 yes24에서 판매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제안적이고 E-book reader 역시 아직은 좋은 편이 못된다. 개발이 더 많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외국의 상황은 다르다 특히 미국은 아마존을 중심으로 시장성이 넓은 것 같다. 특히 아마존은 kindle이라는 좋은 기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은 듯하다. 소니라든가 몇몇 기기가 더 있지만 아직은 내 객관적인 판단으로 kindle이 가장 좋은 것 같다.
그러나 이것도 명백한 한계가 있다. 인터네셔널 판이 있기는 하지만 사용이 미국에 제한적인다. 무선 인터넷과 책을 다운로드 받을 때 발생하는 비용이 다른 나라에서는 더 많이 부과된다.
그리고 한국은 판매도 되지 않는다.

현재 한국에 거죽하지 않으면서 한국의 논문들과 한국의 책들을 pdf혹은 텍스트 파일로 볼 수 있는 기기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검색하던 중...그러던 중..

애플에서 태블렛을 출시한다는 이야기가 점점 확대되어 갔다.
그리고 오늘 저녁(한국 시간으로는 새벽, 프랑스 시간으로는 저녁, 그리고 미국 시간으로는 오전 10시) 스티븐 잡슨이 ipad를 들고 나왔다.

전체적인 느낌,

"아이팟 터치가 커졌어요...."

실제로 스티븐 잡스도 아이팟과 아이폰에서 사용되는 app이 모두 사용될 수 있다고 말한 것 같다. 그리고 아이튠즈와도 완벽히 호환된다고 했다. 똑같다...거의..

한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ipad용 iworks가 있다는 정도 아마도 그 정도 다를것이다.
맨 위 그림은 ipad의 가격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일 궁금해 하는 내용이 그것이 아닐까?
모양을 아이팟을 늘려 놓은 모양.. 10.7인치라던가? 인치가 정확히 기억이 안난다. 11인치인가?

ipad도 E-book과 뉴스 신문 컨텐츠를 강조했다.
내가 가장 관심 가는 부분이기도 하고..

막상 보고 나니 큰 감동은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아이팟 터치를 잘 쓰고 있어서 그런가?

신문과 방송에서 그렇게 이야기하던 아이폰과 아이팟 터치 만큼의 영향력이 있을까?
한국에서는 판매가 될까? 인터네셔널 판은 6월 즈음에 판매가 된다고 한다.
아직 판매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하다.
미국 내수용을 구입해서 사용하지 한는한..
그래도 그것은 가능 할 것 같다.
wipi 있으니... 전화기는 아니니..

그래도...관심은 많이 간다. 빨리 만져보고 싶다.

 


자세한 내용은 http://live.gizmodo.com에 들어가셔서 보세요. 애프 ipad출시 현장을 글과 사진으로 현장 중계한 싸이트입니다. 싸이트에 들어가셔서    왼쪽 상단에 오렌지색으로 표시된 Older posts를 누르시면 이전 포스팅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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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퍼온 사진입니다.)

내가 옛날에 살던 집은 아주 작은 집이었다.
아버지께서 아주 오래전에 내가 7살무렵 손수 지으신 집이다. 그 집에 공장이 딸려 있기도 했지만
워낙에 집이 엉성하게 지어져서 소음이 심한 곳이었다.

집 앞은 한길이었고 집 뒤는 바로 들판이 이어지는, 그래서 집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들판의 찬 바람에 아랫도리가 떨어져 나갈 정도로 추운 그런 곳이었다.

그렇게 추운 바람이 부는 그 겨울이 지나면, 한 여름 그 들판이 주는 바람의 시원함이란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시원함이다. 집 뒤 들판으로 이어진 길, 그래서 아침 저녁이면 경운기 소리로 하루를 시작하고 마감해야 하던 집.

오늘은 그 집, 그 뒤 들판, 그 길이 무척 그립다.
인터넷을 보다가 옛날 집 뒤 들판과 비슷한 풍경의 사진을 보았다. 위에 있는 사진.
지금은 농경정리가 되어서 찾아 볼 수 없는 길.
오늘은 그 길이 무척이나 그립다.
가고 싶다.

길을 걷다 보면 멈춰서야 할 때가 있다.
일을 하다 보면 가만히 멈춰 소리를 들어야 할 때가 있다.
지금이 나에게는 가만히 멈춰서서 소리를 듣고, 마음을 듣고 나를 듣는 시간이다.

프랑스에 와서 더욱 자주 듣는말, 내 말이 모호하단다..
명확해지고 정확해 지기 위해서 멈춰서야 한다.

말을 멈추고 생각을 멈추고 길을 멈추다.
오늘 난 멈춰선다..

멈춰서 나를 본다.

무엇이 좌파이고 무엇이 우파란 말이가?
우파면 모든 것이 정당성이 있는가?

도대체가 알 수 없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좌우’라는 말이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시작되었다는 점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1789년 7월14일 바스티유 감옥을 쳐부수면서 시작된 대혁명은 급기야 군주제를 지속한 것인가 아닌가로 치닫게 됩니다. 그 때 입헌군주제에 찬성했던 지롱드 의원들이 의회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았고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던 자코뱅 의원들이 의회 왼쪽에 모였던 일에서 좌우라는 말이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위의 이야기로 보면 우파는 체제를 유지하는 입장에서 변화를 요구했던 사람들이고 좌파는 체제를 뒤 바꿈으로 변화를 요구했던 사람들인 것 같다. 군주제라는 정체 체제의 변화 앞에 논쟁했던 사람들의 위치에서 시작된 말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의 입장을 살펴보면,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으로 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것 것이 나의 입장이다.
한국에서는 자신들과 조금 다르면 일단 좌파라고 선언을 하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좌파라고 이름불리면 그 때부터는 변호하기에 급급한 형편이 된다.
이것은 대한민국 역사 이래 가지고 있는 공산주의와 대립에 의한 정권 유지에서 나오는 콤플렉스라 생각된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는 그냥 빨갱이라고 말하면 일단 50%는 먹고 들어가는 것 같다.
우리 나라에서는 좌파는 공산주의자라는 등식이 성립되어 있다.
좌파는 공산주의자, 공산주의자는 빨갱이, 빨갱이는 모두의 적, 그러니 좌파는 모두의 적,
힘을 가지고 있는 쪽은 우파라 스스로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것은 어느정도 맞는 이야기 같지만 그렇지도 않다. 우파가 체제를 유지하는 입장에서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이지 한국처럼 자신의 이익을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우파와 좌파의 개념을 잘못 사용함으로 건전한 토론의 문화를 내 던져 버렸다.
성장, 돈, 물질의 숭배, 함께 삶, 더불어 삶을 이야기하면 좌파라고 이야기한다.
나누어 함께 살기를 이야기 하고 분배를 이야기하면 좌파라고 이야기한다.
공산주의자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모든 교회는 공산주의 좌파인가?
또 그렇지도 않다. 많은 교회들이 우파의 선발대같이 행동하고 말한다.
교회가 이야기하는 사상은 전혀 그렇지 않는데..

용어의 혼란에서 오는 생각의 혼란은 결국 토론과 이야기 나눔을 내 던져 버린 꼴이 되었다.

도대체 우리나라 대한민국에서 사용되는 이 언어의 책임은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결국은 미디어에 관련된 엄청난 힘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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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같은 것에 사로 잡혀 보신 적은 없는지요?
저는 스스로 변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주 사로잡힙니다.
그것은 아마다 지금 삶에 대한 불만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합니다.
다른 이들의 삶에 대한 질투에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에 대한 변화가 매우 긍정적인 일임은 분명합니다 .
그러나 그 출발이 다른 이들에 대한 부정적 질투라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죠.
물론 질투가 무저건 나쁜것은 아닙니다.
그 질투가 나를 발전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발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평가입니다.
무엇이 발전이라는 것이죠.

우리가 발전이라고 발하는, 자기 발전과 자기 개발이라고 말하는 부분에 대한 생각 정리가 필요합니다.

조용한 가운데 정중동하며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살핌과 바라봄에서 나오는 발전인지
다른 이들에 눈에 보이는 발전인지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삶에서 발전이란 질투에 의한 발전, 개발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나를 찾는 일에 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의 눈에 보이는 나의 삶에 대한 변화와 개발이 아니었나?

개개인은 변하길 원하나 조직은 변화를 원치 않는다고 합니다.
조직에서의 변화는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를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요즘음 변화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하는 시기입니다.
제 삶에 대한 변화를 요구하고
제가 몸 담고 있는 교회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급한 판단과 생각은 오히려 변화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지금 제 입장이 그렇습니다.

변화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우리의 삶의 원래 모습을 회복하는 일로 관심을 돌려할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 무엇의 변화를 어떻게 요구하고 있는가?
2010년이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시간이 지나서 지금 2010년을 맞이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가끔 시간의 구분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의 구분안에서 벗어 날 수 없음을 깨달았을 때 갑자기 다가 오는 불안감을 이기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2009년 12월 16일 아내와 아이들이 프랑스에 들어왔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정신 없게 함께 적응하는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 아이와는 처음으로 함께 살아보는 것이고 첫째 딸과는 6개월 만에 함께 살아보는 것입니다.
한국에 있을 때도 온 가족이 함께 산 일은 드문 일이기도 합니다.

정신이 없습니다. 아이 둘이 동시에 울기라고 하면...
온 정신이 달아나 버립니다.

그래도 그 마음이 2010년의 마음을 가볍고 즐겁게 해줍니다.
행복합니다. 너무나 기쁨이됩니다.

그래서 더 슬픈 마음이 듭니다.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슬픕니다.
그런일은 있으면 안되겠지만,
혹시라도 다시 못 뵙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2010년 새로운 시작입니다.
새천년을 시작한지 10년이 지났습니다.
안지나갈 줄 알았던 시간인데 벌써 10년 세월 훌쩍 지나가 버렸습니다.
생각해 보면 너무나 많은 것을 얻은 시간입니다.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지금 내 삶의 자리..
다음 10년을 기약해 봅니다.

새해의 다짐은 오늘처럼입니다.
매일을 오늘처럼 살아보자.

메아리되는 다짐을 혼자 해 봅니다.
2009년을 마무리하는 시점, 개량한복을 입은 신부는 절집에 갔고, 머리 깎은 스님은 교회에 갔다. 그들은 모두 “전혀 낯설지 않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오히려 불교 신자가 그리스도교를 알고, 그리스도교 신자가 불교를 아는 것이 자신의 신앙을 더욱 풍요롭게 한다고 말했다. 얼른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들은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말을 하는 걸까.

백성호 기자

서명원 신부
선 수행 시작한 지 15년 … 영성이 더 깊어졌습니다




서명원 신부는 “예수님께선 제게 부처님을 사귀면 사귈수록 나와 더 친해지겠다고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불교인재개발원 제공]


22 일 프랑스 출신인 가톨릭 서명원(56·서강대 종교학과 교수) 신부가 서울 조계사 옆의 총무원 청사를 찾았다. 불교인재개발원이 초청한 자리에서 그는 ‘나의 화두 참선 입문기’란 주제로 강연을 했다. 강연이 끝난 뒤에는 청중과 문답도 나누었다. 29일 서 신부에게 ‘신부님이 절집에 간 이유’를 물었다.

-왜 절집에 갔나.

“불교인재개발원에서 저를 초청했다.”

-왜 초청했나.

“저는 15년째 간화선(看話禪·화두를 통해 진리를 찾는 선) 수행을 하고 있다. 불교 잡지에 글을 쓴 적도 있다. 사람들이 저의 수행담을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리스도교 신앙과 간화선 수행이 충돌하진 않나.

“정리를 많이 했다. 충돌하지 않는다. 충돌보다 조화를 이룬다. 가톨릭 사제인 제게 간화선 수행은 ‘나쁜 긴장’이 아니라 ‘좋은 긴장’을 준다.”

-‘좋은 긴장’이란 뭔가.

“종 교인은 다들 우물 안의 개구리다. 나의 우물만 좋다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다른 종교의 우물에도 들어가 보면 안다. 그곳의 물맛도 좋음을 말이다. 그때 우리는 우물의 원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다른 우물 맛을 봤다고 내 우물 맛을 잊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좋은 긴장’이란 나의 신앙이 더욱 풍요로워 질 수 있음에 대해 열려 있는 긴장이다. ”

-간화선 수행을 했더니 어떻던가.

“간 화선이 쉬운 수행법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맞는 건 아니다. 스승도 잘 만나야 한다. 그리고 오래도록 꾸준히 해야 발전할 수 있다. 하루에 최소한 30분 이상은 해야 한다. 6개월에 한 번은 철야정진도 하고, 스승도 주 1회씩 꾸준히 만나야 한다.”

-그렇게 했더니 무엇이 달라졌나.

“훨 씬 직감적인 사람이 됐다. 직설적이고, 솔직한 사람이 됐다. 전에는 뒤끝이 있었다. 이제는 많이 없어졌다. 사람을 원망하는 일,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엄청나게 많이 줄었다. 저를 괴롭히는 사람을 만나도 자유롭게 뛰어넘는다. 마음으로도, 영적으로도 엄청나게 자유로워졌다.”

-그리스도교가 최고의 종교라고 생각하지 않나.

“나는 가톨릭 신부다. 가톨릭 사제로 살려고 애도 많이 쓴다. 그건 분명하다. 그런데 ‘가톨릭밖에 없다. 다들 개종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게 된 건 간화선 덕분이다. 불교의 넓고 넓은 바다, 깊고 깊은 바다를 발견하면서 저는 더 넓고, 더 깊어졌다. 그렇다고 서명원 신부가 중심이 없는 엉터리 사제는 아니다.”

-넓어짐, 깊어짐이 그리스도교 영성과는 어떤 관계인가.

“불교를 업신여기지 않고, 불교를 존중하는 것이 저를 더 풍요롭게 만든다. 저는 다른 종교의 우물을 마심으로써 그리스도교의 알맹이, 그리스도교의 본질에 더욱더 가까워졌다. 그리고 더욱 원천적인 체험을 하기 시작했다.”

-거꾸로, 한국 불자들은 그리스도교를 아는가.

“현 재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교류는 스킨십 수준이다. 제대로 알려면 그리스도교의 심장까지 들어가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우물 맛을 알려면 그리스도의 신비까지 체험해야 한다. 그리스도교인에게도, 불교인에게도 이웃종교의 우물은 생명의 우물이고, 지혜의 우물이다.”

법륜 스님
불교·기독교 구분 넘어 진리 측면서 서로를 봐야지요




법륜 스님은 “부처님과 예수님은 종교나 종파를 만들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저 진리를 설파하신 거다”고 지적했다. [백성호 기자]

법 륜 스님(56·평화재단 이사장)은 지난 성탄을 맞아 정토회 신자 20여 명과 함께 개신교 교회와 가톨릭 성당을 찾았다. 거기서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며 예배와 미사를 드렸다. 축사도 했다. 많은 이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스님은 왜 그곳을 찾았을까. 28일 서울 서초동의 평화재단에서 법륜 스님을 만났다. 그에게 ‘스님이 교회에 간 이유’를 물었다.

-24일 자정에 갈릴리 교회에 갔다. 망설여지지 않았나.

“전 혀 아니다. 초등학생 때 시골에서 몇 차례 교회에 간 적이 있다. 출가하고 나서 5년 뒤에 서울 강변교회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목사님께서 예배 중에 ‘스님께서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구원을 받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시더라. 저희는 찬송가를 함께 불러드렸다.”

-‘구원을 받으시기 바란다’는 말이 부담스럽진 않았나.

“아니다. 강변교회에선 예배에 참석한 스님이 제가 처음이라고 했다. 이번에 갈릴리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그걸 바라보는 교인들의 시각도 다양하지 싶다. 목사님께선 그것까지 염두에 두시고, 고려해서 조화롭게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갈릴리 교회에서도 따뜻하게 저희 일행을 맞아 주셨다.”

-25일에는 서울 문정동 성당에 갔다. 거기선 무슨 얘길 했나.

“함께 성탄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성경 속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했다. 유대인만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가 유대교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이 외면한 병자를 이방인인 사마리아인이 도운 이야기를 하시며, 이방인에게도 구원이 있다고 하셨다. 그렇게 본다면 ‘기독교에만 구원이 있다’고 하는 건 기독교의 논리가 아니라 유대교의 논리가 아닌가를 물었다.”

-성당에서 또 무슨 얘길 했나.

“기 독교에선 세상 만물을 하느님이 창조하셨다고 한다. 그럼 저도 하느님의 피조물이다. 하느님은 당신의 피조물을 통해서 역사(役事)를 하신다. 그러니 제가 하는 일도 하느님의 역사일 수 있다. 그럼 여러분에게 제가 이방인이 아니고, 손님이 아니고, 저도 여러분과 같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일 수가 있다. 성당에서 그렇게 말했다.”

-그랬더니 반응은.

“박수가 쏟아졌다. 옆에 섰던 신부님이 ‘이제 스님이 우리 문정동 성당의 신자니까 앞으로 주일 미사에 빠져선 안됩니다’라고 하더라. 이번엔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예수의 가르침이 스님에겐 어떤 의미인가.

“예 수님은 인류의 스승 중 한 분이시다. 또한 불교에서 말하는 보살행을 실천하신 분이다. 그것도 목숨까지 내놓으면서 실천하신 분이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에게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하신 건 불교식으로 말해 ‘보살의 마음’이다. 불교의 수행자들이 닿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그 마음이다.”

-신문을 읽는 불교 신자, 기독교 신자에게 한 마디 한다면.

“불 교냐, 기독교냐. 그걸 한 단계 뛰어넘어 진리의 측면에서 봐야 한다. 성경에도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구절이 있지 않나. 우리가 과학을 배운다고 ‘과학의 신자’가 되는 건 아니다. 대신 과학을 배우면 누구에게나 유익하다. 이웃종교로서 기독교와 불교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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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는 영광이요 땅에는 평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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